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미국 방산시장 공략의 초점을 완제품 수출에서 현지 생산능력 구축으로 확대하고 있다. 미 육군의 차세대 자주포 사업에 시제품 공급업체로 선정된 데 이어 자주포 통합시험시설과 대규모 탄약 생산기지 조성을 추진하면서 미국 방산 공급망에 장기적으로 진입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핵심은 K9 자주포 한 종류를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기체계와 탄약, 생산시설, 유지보수 역량을 결합한 통합 사업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미국이 자국 방위산업의 생산능력 확충을 주요 과제로 삼는 상황에서 한화는 글로벌 시장에서 검증한 제조 역량과 현지 투자 전략을 앞세워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미 육군 MTC 사업 진입… 시제품 6대 공급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미국 법인 한화디펜스 USA는 지난 8월 18일 미 육군의 MTC(Mobile Tactical Cannon·기동형 화포) 사업에서 K9 이동형 자주포 시제품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계약은 시제품 6대 공급을 기본으로 하며, 추가 12대를 공급할 수 있는 옵션을 포함한다. MTC는 미 육군의 기동형 화력 전력 현대화와 장거리 화력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이다. 한화가 확보한 이번 계약은 세계 최대 방산시장인 미국에서 자사 포병 체계의 성능과 현지 생산 가능성을 검증받을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이번 계약은 대규모 양산 물량을 확정한 본사업 계약과는 구분해야 한다. 시제품은 실제 운용 환경에서 성능과 신뢰성, 군수지원 능력 등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후속 양산 여부와 규모는 시험 결과와 미 육군의 소요 결정, 예산 및 계약 절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화가 과거 미 육군의 획득계획을 근거로 언급한 최대 500대 규모 역시 향후 사업 확대 가능성을 보여주는 잠재 물량이지, 현재 확정된 발주 수량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업은 미국 시장 진출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시제품 평가에서 성능과 운용 적합성을 입증하고 현지 생산 기반까지 확보한다면 후속 사업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앨라배마에서 생산·시험·유지보수 기반 구축
한화는 미국 내 생산 현지화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한화디펜스 USA는 지난 4월 앨라배마주 오펠라이카에 K9 계열 자주포의 통합과 시험을 담당할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3년 임대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 시설은 미국 내 생산 확대와 시험, 인력 양성, 장기 군수지원 등을 뒷받침하는 거점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투자는 단순한 조립시설 확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미국 방산사업에서는 장비를 납품하는 것뿐 아니라 현지 생산과 부품 공급, 정비 및 성능개량 체계를 갖추는 것이 장기적인 사업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현지 생산 기반은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자국 방위산업 역량 강화와도 연결된다. 해외 기업이 완제품을 수출하는 방식보다 미국 내에서 생산과 지원을 수행하는 구조가 현지 고용과 공급망 확대 측면에서 정책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오펠라이카 시설의 현재 단계는 통합·시험 거점 구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대규모 자주포 양산공장이 이미 완공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실제 생산 규모와 현지 조달 비중은 후속 투자와 사업 진행 상황에 따라 구체화할 전망이다.
아칸소에 22억달러 투자… 탄약 생산까지 사업 확장
한화의 미국 현지화 전략에서 또 다른 축은 탄약이다.
한화디펜스 USA는 지난 9월 21일 미국 아칸소주 파인블러프 아스널(Pine Bluff Arsenal)에 첨단 제조 캠퍼스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총 투자 규모는 22억달러이며, 향후 7년에 걸쳐 약 4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 육군은 2026년 1월 해당 군 시설의 유휴 부지를 활용하는 임대사업자로 한화디펜스 USA를 선정했다. 이 사업은 EUL(Enhanced Use Lease·유휴 군 시설 활용 임대) 방식으로 추진되며, 한화는 해당 부지에서 탄약 생산시설을 구축하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계획된 생산 분야에는 155㎜ 포탄 관련 부품과 추진 장약 등이 포함된다. 이는 미국 내 탄약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노후화된 탄약 산업기반을 현대화하려는 미 육군의 정책 방향과 맞닿아 있다. 미국 시장에서 탄약 생산기지를 확보하는 것은 자주포 사업과도 전략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포병 전력은 화포만으로 운용되지 않는다. 지속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포탄과 장약의 안정적인 공급, 관련 부품의 품질 관리, 정비 및 보급 체계가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따라서 한화가 자주포 현지화와 탄약 생산 투자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미국 포병 산업의 여러 단계에 걸쳐 사업 기반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두 사업이 하나의 통합 계약으로 묶인 것은 아니며, 향후 실제 사업 연계 범위와 공급 관계는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K9·탄약·군수지원 결합… ‘토털 포병 솔루션’ 전략
한화가 미국에서 구축하려는 사업 모델의 핵심은 개별 무기체계 공급을 넘어 포병 전력 운용에 필요한 산업 기반을 함께 제공하는 데 있다. 한화에 따르면 K9 자주포는 세계 여러 국가에서 운용되고 있으며, 누적 운용 및 공급 실적은 2500문을 넘어섰다. 이러한 글로벌 실적은 신규 고객에게 성능과 생산 역량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다. 여기에 미국 현지 생산시설과 탄약 제조기지가 더해지면 사업 영역은 플랫폼 공급에서 생산, 부품 조달, 군수지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단일 제품의 가격 경쟁력만으로 경쟁하는 방식과 차별화되는 전략이다. 물론 자주포와 탄약, 장약은 각각 다른 기술과 안전 기준, 인허가 및 조달 절차를 적용받는다. 따라서 모든 요소를 하나의 패키지로 공급할 수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관련 분야의 제조 역량을 한 기업집단 차원에서 확보하면 사업 간 연계와 장기적인 고객 대응 능력을 강화할 여지가 있다.

호주·유럽 현지화 경험, 미국에서도 통할까
한화는 미국 진출에 앞서 해외 시장에서 현지 생산과 산업 협력을 확대해 왔다. 호주에서는 H-ACE 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 유럽 시장에서도 현지 생산과 기술 협력, 공급망 참여 확대를 추진해 왔다. 이러한 경험은 해외 방산사업에서 현지 산업기반을 구축하고 고객국의 요구에 대응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시장은 다른 해외 시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미국은 자국 방산업체와 기존 공급망이 자리 잡고 있고, 국방 조달 규정과 보안·인증 요건도 엄격하다. 현지 생산시설을 확보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후속 양산계약이나 대규모 공급 물량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결국 미국 현지화 전략의 성패는 시설 투자 자체보다 실제 계약으로 연결되는 생산 물량, 현지 부품 조달 비율, 원가 경쟁력, 품질 및 납기 관리 능력에 달려 있다.
핵심은 투자 규모보다 사업의 연결성… MTC 후속 절차 주목
투자자와 방산업계가 앞으로 살펴봐야 할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 MTC 시제품 평가 이후 미 육군이 후속 양산사업을 어떤 규모와 일정으로 추진할 것인지다. 둘째, 앨라배마 통합시험시설이 실제 생산 확대와 군수지원으로 얼마나 빠르게 연결될 것인지다. 셋째, 파인블러프 탄약 생산단지가 계획대로 구축돼 미국 내 탄약 공급망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확보할 수 있을지다. 특히 22억달러 규모의 탄약 생산 투자는 장기적인 사업 기회인 동시에 상당한 자본이 투입되는 프로젝트다. 시설 구축 일정과 가동률, 고객 확보, 생산 원가 및 투자 회수 기간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현지 투자액과 예상 고용 인원이 곧바로 기업의 매출이나 이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움직임은 새로운 대규모 수주가 한꺼번에 확정됐다는 의미보다, 한화가 미국 방산시장 진입을 위해 추진해 온 전략을 구체적인 사업과 시설로 연결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미국 방산시장의 경쟁은 이제 무기 성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서도 필요한 장비와 탄약을 충분히 생산하고, 정비와 보급을 지속할 수 있는 산업 역량이 중요해지고 있다. 한화가 K9 시제품 공급을 출발점으로 현지 생산과 탄약 제조, 군수지원까지 연결하는 구조를 구축한다면 미국 방산 공급망에서 장기적인 입지를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 가능성을 실질적인 성과로 바꾸는 것은 후속 양산계약과 생산시설의 실행력, 그리고 투자 대비 수익성이다. 결국 한화의 미국 공략은 자주포를 얼마나 많이 파느냐의 문제를 넘어, 미국이 필요로 하는 포병 생산능력을 현지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운영할 수 있느냐의 경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