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인문학] 내러티브의 힘

같은 책을 다시 읽지 않는 편인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회에 휩싸이는 책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것이 인간인가”입니다. 제목도 그렇고 한쪽 모서리에 있는 그림마저 섬뜩해서 읽기를 주저했던 책인데, 일단 읽기 시작하면 책을 놓기가 어렵습니다. 레비는 문학과 역사보다는 수학과 화학을 좋아하던 화학자였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10개월 동안 목숨을 걸고 글을 썼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후에는 그 생존 기록을 책으로 쓰는 걸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지요.

책 표지 그림 이야기를 하자면 독일 여류 화가 케테 콜비츠의 동판화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라는 작품입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작가와 동시대 독일 화가라는 조합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케테 콜비츠는 평생 노동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해 창작 활동을 했고 나치의 전쟁에 반대했던 반전, 평화주의자였습니다.

프리모 레비가 쓴 내용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지만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장치는 거의 없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에서 독일인에 대한 증오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묻자, 레비는 그들을 박해한 건 얼굴 없는 파시즘이었기 개인적인 증오심이나 복수심을 키울 수 없었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파시즘의 망상과 독선에서 비롯된 비인간적인 폭력을 지시한 소수의 괴물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그런 사실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서 알지 못한 채’ 동조하고 방관했던 일반인들이라고 하지요.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험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처음 레비의 책을 읽었을 때, 만약 내가 수용소에서 지독한 배고픔에 시달린다면 빵 한 조각을 뺏기 위해 옆 사람이 죽길 바라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떨면서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만약 내가 평범한 독일인이거나 수용소가 있는 마을의 주민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상상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역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과연 몇 안 되는 예외적인 인물처럼 잘못된 것을 인식하고 행동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레비는 또 경고합니다.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 ‘단순성과 눈부심’으로 들뜨게 하고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게 하는 그런 선각자를 조심해야 한다고.


이런 엉터리 지도자에 현혹당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케테 콜비츠는 그림과 조각으로, 레비는 책쓰기와 강연으로 현실을 고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형식이 어떻든 그 안엔 강렬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주체로서 살아가려면 우리에게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서사, 내러티브가 있다면 흔들릴지언정 추락하지는 않을 거니까요. 개인의 서사가 빈약하다고 예술적 재능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읽고 쓰기만 꾸준히 해도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돛을 달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K People Focus 000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 차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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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5.09.30 00:20 수정 2025.09.3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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